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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종이 땡땡땡

예전엔 미쳐 몰랐던 것들

굳이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되새기지 않더라도 어느새 몸에 밴 습관들을 다시 돌아볼 기회가 생기면 섬뜩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1. 마우스 제스쳐 기능에 중독될 줄 몰랐다.
불여우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불여우 확장기능 모음 사이트에서 "별표 5개"에 매혹되어 설치했던 마우스 제스쳐는 내 손에 익숙해진지 불과 몇 달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손이란 녀석이 어찌나 앙탈스러운지 요즘은 마우스 제스쳐 때문에 불여우를 더 자주 쓰다듬어주게 된다. 웹마나 오페라 등 기타 브라우져에서도 마우스 제스쳐 기능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불여우용 마우스 제스쳐의 초기 세팅값에 익숙해져 버렸다. (창닫기는 'ㄴ자'라는 식으로..)

불여우 1.5베타가 나왔다길래 설치해봤다가 마우스 제스쳐가 안되길래 다시 예전 버전으로 돌아왔다. 이 놈의 손꾸락, 이제 학교 컴실에서 익스플로러 위에다 가로 세로 직각으로 선을 긋고 있다;;

2. 핸드폰이 시계 대용으로 사용될 줄 몰랐다.
지난 여름 방학 때, 공부한답시고 핸드폰을 집에다 두고 다녔다. 저녁이나 밤에 들어오면 핸폰 한 번 쓰윽 보고 '음~ 그래, 요놈이 전화했고, 저놈이 문자보냈구나'라고 하고 그냥; 잤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난리를 치더니 요즘은 오히려 내가 먼저 전화하면 고마워하면서(!) 받아주신다.

후천성 애인 결핍증의 합병증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에 문자 한 두개 정도 주고받는 날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문자나 전화연락을 기다리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더군다나 연락이 와도 빠안히 액정을 보면서 '얘가 전화를 하네. 왜 했을까?'라고 생각만 한다. 그러다 한참 뒤에 생각나면 연락해보고 잊어버리면 또 그냥 넘어가버린다.

생일이라든가 기타 축하해줄 일, 위로해 주어야할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연락을 하긴 하는데 어쨌든 내 휴대폰의 주요 기능은 "시계"가 되고 말았다.

3. '누군가를 만난다'라는 것의 의미가 이토록 소중한 것인지 몰랐다.
오늘은 군대 후임병 녀석들을 만났다. 제대한 지 일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불러서 죄송하다는 녀석들에게 "군대에서도 충성 안 했던 녀석들이 무슨... 됐다, 짜샤." 라고 농을 건넸지만 별 시덥지 않았던 고참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녀석들이 고맙다.

일병 휴가 때 - 담배를 꺼내물면 "자살방지제"라는 문구가 담배 위로 선연히 보이는 것 같았던 그 때 - 는 미칠듯이 군대가 싫었다. 말년 휴가를 앞두고 하루하루가 지겨움의 연속이었던 그 때는 내가 어디가서 이런 대접 한 번 받아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늘 뿐만 아니라 종종 후임병 녀석들이 "형! 우리 술 한 잔 해야죠?"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조금 미안해진다.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더 좋은 고참이 되었어야 하는데... 하는 약간의 후회와 아쉬움이 뿌옇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구리디 구린 복학생 선배를 "형!"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고맙다고 말해주는 후배들을 볼 때도 나는 늘 면목이 없어진다. 입대 전, 나는 참 못난 짓을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학회였는데 그네들은 온전히 나를 받아주었고, 나의 복학 첫 학기는 성공적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내세울 것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약간의 알코올 기운은 언제나 횡설수설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예전에 미쳐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큰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