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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며 부대끼며

사랑, 그 잔인한 [행복]


행복
/ 감독: 허진호 / 출연: 황정민, 임수정, 공효진 외 / 124분 / 2007.10.3 개봉


개봉 첫 날, 입소문을 들어보지도 않고 보는 영화는 흔치 않다. 여자친구로부터 '행복'의 감독이 허진호라는 것과 황정민, 임수정이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고선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내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습니다."라던 정원(한석규)의 마지막 모습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상우의 질문에 "...미안해..."로 대답하던 은수의 표정은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 같았다. 바로 그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아닌가.

게다가 교도소 스피커를 냅다 뜯어버리고 매달리던 석중(황정민)의 모습을 눈물 없이 지켜보긴 힘들었고, 눈썹을 밀고 뻐드렁니를 끼운 채 건전지로 연명하던 영군(황수정)의 활약(!)을 생생히 기억하는 지금, 그 두 명의 배우가 허진호 감독과 함께 나온다는 데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행복'은 '봄날은 간다'보다는 편안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는 잔인한 영화였다.

영화는 큰 감정의 기복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들이 연인이 되었을 때에도, 다시 남남이 되었을 때도 가슴이 울렁거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죽기 위해 달려가는 은희를 보면서도 그저 무덤덤할 뿐... 그 놈의 화분을 냅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봄날은 간다'를 볼 때보다 훨씬 편안한 느낌이었다. 영수가 이별을 알릴 때 내뱉던 은희의 욕설은 부족했다. 더 심했어야 했다.

그래도 떠나버린 정원의 모습보다, 남아있는 영수의 꼬라지가 더 형편없다는 점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는 조금 더 잔인한 영화였다. 자신에게 침을 뱉던 영수는 그 후로 어떻게 살아갈까...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행복'의 잔인한 고통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한다. 잊고 싶은 기억일 뿐더러, 이미 흐릿해진 감정을 애써 올올히 되살릴 이유는 전혀 없다. 조제를 보고, 정원을 보고, 은수를 보며 광분했던 날들은 이제 영원히 안녕이니까.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잔인한 고통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내 곁의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 임수정도 예뻤지만 공효진도 멋지다. 공효진은 이런 이미지 - 살짝 양아치 같은;; - 에 적격이었다.
+ 박인환 아저씨를 보며, 담배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떤 면에선 금연/금주 홍보 영화..
+ "간경변, 재주 좋네?"라던 아저씨와 그 트리오의 '창문 밖 합창'은 절대 놓치지 마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