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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종이 땡땡땡

아! 은주씨! 그렇게 가시면 안되는데...



스터디 모임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스터디 멤버 중 한 명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은주, 자살했대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진짜? 그거 뻥이지? 에이, 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되지... 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어. 자살한 거 맞어. 어제 저녁에 죽었대.

잠시 어리벙벙한 사이, 다시 한 번 놀라는 소리. 주홍글씨에서의 심한 노출 때문에 자살했대요. 헉. 맛있게 먹던 닭갈비가 하마터면 목에 걸릴 뻔 했다.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내 지난 대학시절을 추억하는 것과 같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SBS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였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괜찮네, 저 사람. 이 것이 1999년의 일이다.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2000년이 되었을 때, 지구가 망하기는 커녕,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그 때,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본 <오! 수정>은 독특하고 강렬한 영화였다. 남자와 여자의 사고방식의 차이, 관점의 차이, 이해의 차이... 이은주는 아름답지만 표독스러웠고, 의뭉스러우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수정이", 그 자체였다.

휴학을 하고, 집구석에 쳐박혀 폐인생활을 하던 2001년의 여름, 친구와 함께 맥주캔을 들고 <번지점프를 하다>를 봤다. 영화 속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잊어야할 내 사랑을 닮아있었고, 만나고 싶은 내 사랑의 현현인 것만 같았다. 비디오가 끝나고도 한동안, 나와 내 친구는 씨발과 젠장을 안주로 맥주를 들이켰고, 죄 없는 빈 캔만을 처량하게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쓰디쓴 군생활을 즐겨야만 했던 2002년 가을, 나는 <연애소설>을 보았다. 연애소설은 이은주와 손예진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영화이므로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라며 온 중대에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 즈음, 나에게 연애는 더 이상 소설이 아니었고, 가혹하기만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애는 소설이길 바랬고, 영화는 아름다웠다.

군대에서의 심심풀이 중 하나는 편지쓰기 였다. 2003년 봄, 따끈따끈한 세 줄짜리 상등병 마크의 무게를 이기지못해 기쁨의 비명을 지를 무렵, 우리 내무반에서 가장 애용되는 편지지는 "영화 포스터 편지지"였다. 군인이라면 한 번쯤 사용해봤을 그 편지지에서 "이은주가 나오는 편지지"는 무조건 내 차지였다. 고참이고, 후임이고 이은주가 나오면 나를 줬다. 물론 손예진이 나오는 편지지도 나를 줬지만, 손예진은 "브라보콘 스티커"라는 아이템을 따로 수집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이은주 편지지에 더 정이 갔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부대끼며 잊혀진 2년여의 공백을 채워가야 했다. 유럽 하늘 아래, 그 동안 나는 참 좁은 곳에서 아웅다웅했다는 생각도 하고, 잠깐 스쳐지나간 애인도 있었고, 학점의 일희일비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은주는 <불새>에서 얼굴을 비췄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제 내게 익숙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국민의 1/4이 봤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못봤다. 이은주가 나온다는 이유 만으로도 언젠가는 꼭 보리라 다짐하고 있다.

그렇게 1년을 보냈고, 그녀는 <불새>로 베스트 커플상인가 하는 상도 받았다. 그녀가 상을 받는 사이, 나는 이제 1년 남은 졸업을 기억하며, 나름대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나간 날은 돌아보지 않고, 다가올 날만을 위해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 그것도 자살했다. 내 빛날 미래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려고 애쓰고 있는 오늘 저녁, 그것도 맛있는 저녁을 먹다가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은주의 영화들은 내 지난 날의 궤적과 맞닿아 있다. 나는 이은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많았던 나의 기쁨과 슬픔과 감동과 좌절을 한순간에 추억해 볼 수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자살해 버린 것이다.

이은주를 좋아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팬이냐고 묻는다면 조금 주저한다. 나와 동갑내기인 이은주는 내게 그저 담담히 언제까지나 거기 그렇게 있을 것 같은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로 비참한 내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고, 견딜만했던 나를 후벼파기도 했지만,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게 아니냐고 부추기기도 했었다. 그녀의 영화는 내게 늘 각별했고, 아직도 그러하다.

내가 중학생 때, 김광석이 죽었다. 그 때도 조금 우울해졌지만, 오늘은 훨씬 울적해진다. 펑펑 울고 싶은 건 아닌데 마음 한 켠이 쓰리다. 나는 어쩌면 그녀와 함께 내 지난 추억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더러운 말들이 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혹 그녀의 죽음에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면 말끔히 해소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그녀는 아름다운 배우이자,

나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