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그녀에게서 문자를 한 통 받았습니다.
"잘 지내? 시간 되고 마음도 되면 잠깐 만나고 싶은데.. 아무날에나 편한 시간에."
지난 6년여의 세월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겁부터 났습니다. '이번엔 또 뭘 주려는거지?' 제대 후, 그녀의 싸이월드를 방문했다가 [이벤트에 당첨]된 적이 있었거든요. 무지하게 쪽팔렸습니다. 며칠 뒤 그녀에게서 쪽지가 왔었죠. 제게 줄 게 있으니 만나자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는데 만났습니다. 여전히 묵묵부답이던 그녀는 조용히 뭔가를 건네주었습니다. 제 어릴 적 사진 몇 장이었죠. 제가 헤어질 때 그랬었대요. 나에겐 소중한 사진이니 헤어지더라도 돌려달라고 했었다고. 전 기억도 안나는데 그녀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 왕창 술만 마셔댔습니다. "우리, 그 때 왜 헤어진거야?"라는 질문은 여전히 반복되었고 여전히 그녀는 묵묵부답이었구요. 그 날이 그녀를 본 가장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벌써 2년이 넘은 이야기네요.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오락실에 갔습니다. 쿵쾅쿵쾅. 오락소리인지 심장소리인지 분간이 안되더군요. 담배 한 대 피우고 그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녀는 변한 게 없더군요. 아니 없어보였습니다. 저보다 조금 작은 키도, 저보다 많이 작은 눈도, 화장기없는 얼굴에 안경을 쓴 것도... 생기발랄하게 물었습니다. "뭐 먹을래?"
부대찌개를 시켜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 제가 질문하고 그녀가 대답했죠. 또 뭔가 내가 받을 것만 같은 전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번엔 또 뭐 주려고? 얼른 받고 가자." 그녀는 제게 줄 거 없으니 마저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그녀의 손가방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부피가 작은 걸로 봐서 책보다 작은 것 정도만 들어갈 듯 했습니다. 그렇다면... 청첩장?!
저녁을 먹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다 우리 동네 놀이터로 갔습니다. 캔맥주 한 캔씩 들고 벤치에 앉아 또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 담배도 피웠습니다. 담배 연기가 자꾸 그녀 쪽으로 갑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괜찮지 않은 몸짓을 보고 자리를 바꿔 앉았습니다.
일단 제가 받을 건 없었습니다. 일단 안심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왜 보자고 했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 그녀 때문에 폐인처럼 살았던 지난 날들이 생각났습니다. 왜 자꾸 지낼만하면 한번씩 건드리는지, 완전히 잊어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지 못하는 제 앞에 불쑥 나타난 그녀가 불편했습니다.
"왜 만나자고 했냐?"
"보고싶어서..."
보고싶었댑니다.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을 땐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이제서야 보고싶었댑니다. 남친이랑 헤어진지 몇 달 되었답니다. 남친하고 헤어지니 첫 사랑이 생각나더라. 이거 완전 신파극도 아니고, 드라마도 이렇게 진행되면 시청자들이 욕하는 요즘인데. 만류하던 친구들의 말들이 떠오릅니다. - 그녀의 문자를 받고 저의 측근들에게 전화를 했었거든요;;; - 그녀도 별 수 없는건가..싶었습니다. 나 역시 또 한 번 이렇게 짜증나게 속상하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맥주 한 캔을 더 사다마시면서 또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전 마구 복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 앞에 있고,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이 눈 앞에 있고, 그렇게 싫은 사람이 눈 앞에 있고, 그렇게 그리운 사람이 눈 앞에 있었습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습니다. 이래저래 뒤숭숭하기만 했습니다.
애증으로 남은 저에게 그녀는 애정으로 다가왔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이제서야, 왜 5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자리를 만들었을까요. 지난 내 아픈 기억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표정,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무언가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있었습니다.
3시간쯤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제 옆에 앉을 자리가 있을지 없을지, 있다면 꽃방석인지 가시방석인지 궁금해했고, 전 계속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옆에 있었습니다. 제 바로 옆에요. 손만 뻗으면 닿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전 그녀가 나빴다고, 못된 X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미워할 수 없더군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는데 밉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친다는게 이렇겠구나..싶었습니다.
"휴우..."
깊은 숨을 한 번 들이키고 기일게 뱉어낸 후,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꼬옥 잡았습니다. 그녀는 더 세게 잡더군요. 포옹도 한 번 했습니다. 꼬옥 안았습니다. 더 세게 꼬옥 안더군요. 뭐가 먼지 정리도 못한 채 그렇게 저는 무언가 큰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녀를 바래다 주었습니다. 예전에 함께 다니던 길을 함께 걸어갔습니다. 참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주 가던 그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뽀뽀도 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키스였군요. 뽀뽀와 키스의 차이는 설왕설래의 유무라고 배웠거든요. 쓰고보니 민망하지만 할 때는 좋았습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집에 와보니 새벽3시쯤 되었습디다. 설핏 잠이 깨신 어무이, 아부지께 제대로 욕먹었습니다. 내일 학교갈 놈이 정신이 있는거냐고.
욕을 먹고도 컴퓨터를 켰습니다. 왠지 블로그에 뭔가 남겨두어야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요 옆에 달아놓은 YAG라는 메신저로 쪽지가 왔습니다. "이제는 말해야할 것 같아서"였던가? 암튼 뭐 그런 쪽지였는데 청진기 대볼 것도 없이 진단 딱 나왔습니다. 그녀였습니다.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살색 영화를 보고 있다가 친구의 누나에게 들켰을 때도 이것보단 덜 부끄러웠습니다. 이 곳의 올빼미와 현실의 내가 완전히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곳은 제게 꽤 적나라한 곳이니까요. 당장 MSN 주소를 부르라고 닦달을 했습니다.
그녀는 한 달 전쯤 구글에서 제가 주로 쓰는 아이드를 검색해보고 찾았다고 했습니다. 구글 참 괜찮은 사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구글, 이 ㅈㄱㅇ 사이트!"라고 외쳐버렸습니다. 아니 따져보니 2번째군요. 몇 년 전, 그녀의 아이디를 검색했는데 신통찮은 결과물을 보여줬을 때가 처음이었던 같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블로그는 공개되었고, 그녀는 찾아낸걸요. 그녀에게 번쩍하는 빨간 불빛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잠깐 그 불빛을 보고 싶었구요. 어쨌든 우리는 옛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웠습니다. 물론 다음날 학교에서 저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미칠 뻔 했지만요.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요. 전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걸까요. 저는 그녀가 괘씸한데, 죽도록 미웠는데 왜 다시 그녀를 보니 또 좋아지려고 하는걸까요. 그녀는 무슨 염치로 제게 다가와서 그런 이야기들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었을까요. 감언이설과 감탄고토. 인생사의 온갖 험악한 사자성어들은 다 겪어봄직했던 지난 수 년간의 세월동안 나와 그녀는 대체 어떻게 변한걸까요.
친구들은 무어라 할까요
멍한 아침,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개학 후의 학교는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문자를 받았습니다. 낯설었습니다. 그 시간에, 그런 문자를 받아본 것이 얼마만이었던가요. 그것도 그녀에게서 말입니다.
그 날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매일 만났습니다. 밤늦게 전화를 하다가 저는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녀도 울었습니다. 울다가 웃었습니다. 웃다가 울었습니다. 그래서 똥꼬에 털이 좀 더 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또 친구들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면 언제나 황홀해집니다. 어제 통화했던 친구는 "오매불망하더니 잘 됐구만."이라고 해줬습니다. 오늘 통화한 친구는 "좋냐, 이 ㅆㅂㄹㅁ?"라고 했습니다. "어."라고 할 수 밖에요.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만류하고 있는데 저는 그저 사람좋게 그녀를 보고 웃고 있습니다. 너 그러다가 또 크게 다친다며 걱정스레 한 마디씩 하는데 전 그저 허허 웃습니다. "모르겠다, 나도.."라며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 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젠 지워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왜 돌아왔느냐고, 이제 와서 왜 그러냐고 내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를 보니 전 어느 새 예전의 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저 좋았습니다. 제 눈 앞에 있었거든요. 제 곁에 있었거든요. 늘 그렇듯이 조용하게 웃으면서 말이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맙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왜 그랬느냐고 구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게 미안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성급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그리 오래 참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도 하고 따져보기도 해야했지만 생각만큼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 바보인가 봅니다. 미쳤나봅니다. 뭔가 내가 손해보는, 뭔가 내가 밑지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어쩌면 인생을 건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건 잊기로 했습니다. 가끔 생각이 나서 힘이 들 때면 그녀에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기로 했습니다. 화도 내기로 했습니다. 투닥투닥거리며 살아가자고, 이제는 더 이상 담아두고 살지 말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사랑스럽게 승낙해줬습니다.
이런 기분, 참 오랜만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 마음, 손에 땀이 날지언정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함께 있으면 1시간이 1초같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행복합니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애써 외면했던 가슴벅찬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즐겁고도 행복한 하루하루입니다.
스크롤하신 분들을 위한 한줄요약: 올빼미, 애인 생겼습니다. 첫사랑 그녀랑 다시 사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