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썸네일형 리스트형 딜레마 오늘 동생이 입대를 했다. 논산 훈련소로 들어갔는데 주특기를 무엇으로 배정받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나도 논산으로 입대했었는데 4.2인치 박격포를 훈련받고 전방 GOP부대로 배치됐었다. 내 전철을 밟는 것도 걱정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야, 혹여라도 전경으로 차출되진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동생은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수도회 교육과정 중 청원기를 보내고 있던 동생은 제대 후 약간의 시간 동안 수도사로서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볼 기회가 있다고 한다. 그 후 수련기를 거쳐 유기서원기를 마치면 종신서원 이후 온전한 수도사로서 생활하게 된단다. 수도원에 있을 때에는 전화나 이메일은 물론 편지도 주고 받지 못했다. 그러다 이제 군대를 가니 편지도 되고, 전화통화도 할 수 있고, 휴가 때 얼굴도.. 전화카드 한 장 전화카드 한 장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 /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 전화 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 줄 것이 있노라고 - 노래 : 꽃다지 며칠 전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같았는데, 목소리 듣고 싶었던 날이 그 얼마나 많았는데, 짧은 안부인사 외에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복받치는걸 억지로 참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했더니, "또 울어?"라던 녀석. 지도 울먹거렸으면서... 밖에 나와 담배 한 대 .. 내 동생 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 친구가 부를 때는 종합무술인,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베드로, 형아가 부를 때는...너! 야! 그리고 이 새끼. 형아가 부를 때는... 나는 한번도 동생을 왕자님으로 부르지 않았다. 진심으로 따뜻하게 내 동생을 불러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내 잘못이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 김광규 서울에서 속초까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를 옆에 태운 채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틈틈이 눈을 돌려 북한강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을 것을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닌데 긴 세월 함께 살면서도 그와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다. 내 동생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하다.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 아이들이 당황했던 일 오늘 동생의 재수학원 등록을 위해 함께 몇 군데의 학원을 둘러보았다. 부모님이 이제 연세가 좀 있으신대다 어무이는 오래 걸어다니시면 금방 피곤해하시므로 내가 가기로 했다. 사실 녀석과 함께 바람도 좀 쐴겸 내가 먼저 나가자고 했다. 몇 군데를 돌아다녀본 후, 녀석과 내가 동시에 점찍은 곳에 등록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생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 몇 가지를 들었다. 하긴 나랑 7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라서 예전부터 "나의 정신세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유머에도 익숙해져 있지만 오늘 얘긴 충분히 공감하면서 신나게 웃었다. 아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지난 번의 내 착각에 대해서. 동생 역시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고 한다. 저만치에서 예쁜 여학생 둘이 오고 있었단다. (얘네들은 꼬옥 둘이 다닌다.) 내심 "폰.. 재수생이 된다는 것 얼마전 입시에서 쓴 물을 마신 후, 한동안 "인디밴드를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해서 온 식구를 긴장시켰던 동생이 재수학원 입학시험에서도 불합격하고 말았다. "올 해에 온 몸을 불태워서(동생은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공부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인디밴드를 하겠다"고 선언하여 안정(?)을 되찾은 식구들은 다시금 걱정어린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몹시 몸이 약했고, 어려서는 입원도 자주 하고 잔병도 많았다. 그래서 부모님(특히 아부지)은 나에게 하셨던 것과 달리 동생에게는 "공부는 못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며 학업성적에 대한 압박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요즘 아부지께선 가끔 "네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지금쯤 입학증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란 뉘앙스의 말을 하신다. 내가.. 낙천적인 동생의 낙천적인 수능점수 어제 시험을 끝낸 녀석이 현관문을 열고 등장하던 그 순간, 온 식구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고생했다!!" 나는 끝내 "시험 잘 봤냐?"라고 묻지 않았다. 점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내가 익히 경험해봤으니까. 당시 나는 시험전의 격려전화도 부담스러웠지만 시험 직후 걸려오는 "잘 봤냐? 어땠냐?"는 전화가 더욱 짜증스러웠다. 물론 모든 전화는 어무이께서 처리하시도록 부탁드렸지만... 아무튼 간만에 외식하고 녀석은 친구들이랑 약속있다고 휙 떠났고 남은 세 식구만 집으로 왔다. 내 시험과도 관련이 있고 문제가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해설방송을 봤다. 언어영역 듣기 문제 해설이 끝날 무렵, 어무이가 동생의 수험표를 가져오셨다. 어무이와 나는 마치 비밀회의라도 하는양 그.. 동생 이야기 + 복숭아님의 동생 이야기에 대한 오마쥬 4.5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나 "외동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몰아서 받고 있던 나에게 7년 만에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동생이라는 낯선 존재의 등장이었다. 내 동생은 당시 초등학교 (그 때는 국민학교였다) 1학년이었던 나의 팔뚝만한 몸뚱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더니 줄곧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연히 부모님의 모든 관심은 동생에게 쏠렸고, 나는 투덜거리며 학교가 끝나면 동생을 보러 -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를 보기 위해서 - 병원으로 가곤 했다. 더 이상 받아쓰기 백 점 맞은 것으로는 우는 동생을 달래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 어려웠고, 아빠는 늘 "이젠 형노릇을 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배가 뒷동산만큼 불러..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