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던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그러니까 이제 막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둘 무렵, 나는 동네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분이시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 나는 그 학원을 다녔다. 수학은 3개월 정도 다니다가 말았고, 영어는 1년쯤 듣다 말았지만, 국어는 계속 들었다. 그 선생님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때까지 내가 만난 다른 어떤 국어 선생님들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국어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알고 싶어했고, 알아야하는 새로운 일들을 설명해주시기도 했고, 재미난 농담도 많이 해주셨다. 그 분을 통해서 나는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고,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국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인문계로 가겠다고 하던 날, 우리 아버지는 내내 침묵하셨다. 그 때,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비록 직업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국어 공부하면 재미있고 좋다고, 계속 이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아버지는 침묵 끝에 허락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 시험을 치르고 원서를 쓰면서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국어국문과를 선택했다. 3군데 원서를 넣으면서 모두 국어국문과를 선택했다. 모두 합격했다. 썩 좋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기뻤다.
새내기 티가 줄줄 흐를 무렵, 문득 그 학원 선생님이 기억났다. 날 참 많이 예뻐해주신데다, 우리 학교 대학원에 다니신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전화 통화를 한 후,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뵙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 그 선생님을 만나뵙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신 듯 했다. 난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에는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힘들고 답답했던 마음을 덜어버릴 수 있었다. 선생님이 고마웠고, 또 감사했다.
작년 말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선생님을 뵈었다. 대학원을 가야할지, 임용고사를 봐야할지, 취직을 할지 이래저래 선택의 기로에서 난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몰랐고, 대학원에 계신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보려고 했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내가 힘을 낼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안내는 성공한 사람에게로부터 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는 대학원 얘기만 들었고, 다른 이야기는 내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명함 몇 장을 주셨다. 하나는 지금 계신 학원 명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쇼핑몰 명함이었다. 사모님과 함께 하시는 거라고만 말씀하시고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난 뭔가 사업을 시작하셨나보다..라고만 생각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올해 초,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고, 계절학기 수강에다가 이래저래 잡일이 겹치면서 정신없이 정초를 보냈다. 어느날,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잘 지내냐고, 보고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새해 인사도 드리지 못한게 좀 죄송스러워서 선뜻 연락을 못드렸다. 하지만 내게 어떤 분이신데... 전화를 드려서 약속을 잡았다.
엊그제 학교에서 만났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선생님은 내게 "꿈"이야기를 강조하셨고, 몇 권의 추천해주신 책도 읽었다. 다만 중고등학교 때 추천해주시던 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들이었지만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니까 믿고 읽었다. 나에겐 좀 어색하고 거북한 면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좋다고 추천해주셔서 끝까지 읽었다.
책 이야기며, 꿈 이야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선생님이 시간관리에 관한 강의가 있으니 시간되면 한 번 들어보라고 하셨다. 뭐 그런 것까지 들을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선생님이 강력추천하셔서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지금 나에겐 시간 관리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할 때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 스스럼없이 약속을 했다.
어제 선생님과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선생님은 날 데리고 모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의 물류센터 정도 되는 곳을 보여주시고, 이런 저런 설명들을 해주셨다. 오늘 강의가 이 곳에서 꽤 높은 직급에 있는 분이 하는 강의인데 이 회사 얘기가 안나올 수가 없을테니 미리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 제품은 우리 집에도 꽤 있고, 다단계 판매방식이 피라미드와 달리 합법적이며 그 회사는 합법적이고 널리 알려진 회사라는 정도의 배경지식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씩 선생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모님과 다른 여자분 한 분이 오셔서 네 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과 10년 된 사제지간임을 두 분께 말씀드렸다. 나 역시 선생님과 10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 것보다 불과 이틀전에 내가 알던 선생님과 너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에 더욱 놀랐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선생님은 그 곳 서점에 들러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2시간짜리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강의의 목적은 그 회사와 관련된 이들이 보다 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고, 나처럼 회사와 관련없는 사람이 그저 한 번 듣기엔 썩 좋은 강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선생님 앞에서 차마 똥씹은 표정은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어색해하며 나가려고 하는데, 일층에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있었다. 여기저기 소그룹으로 나뉘어서 원을 이루고 서있는데, 나와 선생님도 그 중 한 곳으로 갔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강의소감을 말했다. 내 차례가 오자 선생님이 간략하게 내 소개를 하시곤 나에게도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난 무척 당황해서 안하려고 했는데 분위기상 "좋았다" 정도로만 대답을 했다. 소감이 끝나자 다음 강의 안내를 하고는 갑자기 사람들이 손을 잡는다. 헉. 내 손도 잡는다. 그러더니 중간에 리더격인 듯한 분이 말씀하신다. "되게 어색해 하시니까 그냥 '하나, 둘, 셋'만 해주세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나, 둘, 셋을 외쳤다. 뭐라뭐라 구호를 외치더니 헤어졌다.
나오는데 선생님이 같이 따라오신다. 선생님은 강의 하나 더 듣고 가신다고 했다. 나는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검은 가방 하나를 내밀어 주신다. "집에 가서 한 번 꼭 읽어봐. 테잎도 한 번 들어보고." 그 앞뒤에 있었던 말은 내가 놀래거나 너무 당황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내 의도는 좋은 강의 들려주려던 것이었다 등등의 내용이었지만 너무 혼란스러워진 내 귀에 그런 말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아니 벌써 오늘이 되었군. 오늘 점심 때 선생님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잘못되신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합법적인 회사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작년 중순부터 불과 몇 주 전까지, 선생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들이 대부분 오늘을 위한 준비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되찾으라는 말, 성공은 성공한 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말... 추천해주신 책들도 어제 본 그 회사의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제는 별생각없이 잠들었는데 오늘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이제 곧 선생님을 만나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선생님은 내게 자료를 읽었는지, 테잎은 들었는지 물어보실 것이다. 자료는 읽어보았지만 테잎은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을 시간도 없었다. 선생님은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나의 미래와 꿈을 준비하며, 함께 하자고 권유하실까?
두렵다. 한편으론 끝없는 절망과 회한이 밀려온다. 내가 그토록 따르고 좋아했던 선생님이 왜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건지 알 수가 없다. 설령 그 사업이 정말 비전있고, 정말 획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아직 사업을 할 상황이 아닌데...
엊그제 선생님은 나를 처음 만날 때, 당신은 햇병아리 강사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스스로 초보라는 것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그 때의 선생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내게 문학과 인생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셨던 그 분이 왜 이렇게 변하셨을까.
내가 그 회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을수도 있다.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고, 알고보면 정말 좋은 곳일수도 있다. 그래서 너무 좋은 곳이라서 선생님이 내게 소개시켜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좀 있으면 그 분을 만나야 한다. 나는 내 평생의 은사님으로 모실 줄 알았던 한 분의 스승님을 이토록 망설이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쓰리다. 칼로 베어 소금을 뿌린 것 같다. 모르겠다. 세상이란, 사회란 이렇게도 힘든 곳인가... 두렵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 나는 그 학원을 다녔다. 수학은 3개월 정도 다니다가 말았고, 영어는 1년쯤 듣다 말았지만, 국어는 계속 들었다. 그 선생님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때까지 내가 만난 다른 어떤 국어 선생님들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국어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알고 싶어했고, 알아야하는 새로운 일들을 설명해주시기도 했고, 재미난 농담도 많이 해주셨다. 그 분을 통해서 나는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고,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국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인문계로 가겠다고 하던 날, 우리 아버지는 내내 침묵하셨다. 그 때,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비록 직업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국어 공부하면 재미있고 좋다고, 계속 이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아버지는 침묵 끝에 허락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 시험을 치르고 원서를 쓰면서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국어국문과를 선택했다. 3군데 원서를 넣으면서 모두 국어국문과를 선택했다. 모두 합격했다. 썩 좋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기뻤다.
새내기 티가 줄줄 흐를 무렵, 문득 그 학원 선생님이 기억났다. 날 참 많이 예뻐해주신데다, 우리 학교 대학원에 다니신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전화 통화를 한 후,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뵙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 그 선생님을 만나뵙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신 듯 했다. 난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에는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힘들고 답답했던 마음을 덜어버릴 수 있었다. 선생님이 고마웠고, 또 감사했다.
작년 말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선생님을 뵈었다. 대학원을 가야할지, 임용고사를 봐야할지, 취직을 할지 이래저래 선택의 기로에서 난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몰랐고, 대학원에 계신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보려고 했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내가 힘을 낼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안내는 성공한 사람에게로부터 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는 대학원 얘기만 들었고, 다른 이야기는 내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명함 몇 장을 주셨다. 하나는 지금 계신 학원 명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쇼핑몰 명함이었다. 사모님과 함께 하시는 거라고만 말씀하시고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난 뭔가 사업을 시작하셨나보다..라고만 생각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올해 초,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고, 계절학기 수강에다가 이래저래 잡일이 겹치면서 정신없이 정초를 보냈다. 어느날,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잘 지내냐고, 보고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새해 인사도 드리지 못한게 좀 죄송스러워서 선뜻 연락을 못드렸다. 하지만 내게 어떤 분이신데... 전화를 드려서 약속을 잡았다.
엊그제 학교에서 만났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선생님은 내게 "꿈"이야기를 강조하셨고, 몇 권의 추천해주신 책도 읽었다. 다만 중고등학교 때 추천해주시던 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들이었지만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니까 믿고 읽었다. 나에겐 좀 어색하고 거북한 면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좋다고 추천해주셔서 끝까지 읽었다.
책 이야기며, 꿈 이야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선생님이 시간관리에 관한 강의가 있으니 시간되면 한 번 들어보라고 하셨다. 뭐 그런 것까지 들을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선생님이 강력추천하셔서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지금 나에겐 시간 관리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할 때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 스스럼없이 약속을 했다.
어제 선생님과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선생님은 날 데리고 모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의 물류센터 정도 되는 곳을 보여주시고, 이런 저런 설명들을 해주셨다. 오늘 강의가 이 곳에서 꽤 높은 직급에 있는 분이 하는 강의인데 이 회사 얘기가 안나올 수가 없을테니 미리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 제품은 우리 집에도 꽤 있고, 다단계 판매방식이 피라미드와 달리 합법적이며 그 회사는 합법적이고 널리 알려진 회사라는 정도의 배경지식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씩 선생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모님과 다른 여자분 한 분이 오셔서 네 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과 10년 된 사제지간임을 두 분께 말씀드렸다. 나 역시 선생님과 10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 것보다 불과 이틀전에 내가 알던 선생님과 너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에 더욱 놀랐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선생님은 그 곳 서점에 들러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2시간짜리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강의의 목적은 그 회사와 관련된 이들이 보다 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고, 나처럼 회사와 관련없는 사람이 그저 한 번 듣기엔 썩 좋은 강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선생님 앞에서 차마 똥씹은 표정은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어색해하며 나가려고 하는데, 일층에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있었다. 여기저기 소그룹으로 나뉘어서 원을 이루고 서있는데, 나와 선생님도 그 중 한 곳으로 갔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강의소감을 말했다. 내 차례가 오자 선생님이 간략하게 내 소개를 하시곤 나에게도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난 무척 당황해서 안하려고 했는데 분위기상 "좋았다" 정도로만 대답을 했다. 소감이 끝나자 다음 강의 안내를 하고는 갑자기 사람들이 손을 잡는다. 헉. 내 손도 잡는다. 그러더니 중간에 리더격인 듯한 분이 말씀하신다. "되게 어색해 하시니까 그냥 '하나, 둘, 셋'만 해주세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나, 둘, 셋을 외쳤다. 뭐라뭐라 구호를 외치더니 헤어졌다.
나오는데 선생님이 같이 따라오신다. 선생님은 강의 하나 더 듣고 가신다고 했다. 나는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검은 가방 하나를 내밀어 주신다. "집에 가서 한 번 꼭 읽어봐. 테잎도 한 번 들어보고." 그 앞뒤에 있었던 말은 내가 놀래거나 너무 당황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내 의도는 좋은 강의 들려주려던 것이었다 등등의 내용이었지만 너무 혼란스러워진 내 귀에 그런 말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아니 벌써 오늘이 되었군. 오늘 점심 때 선생님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선생님이 무언가 잘못되신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합법적인 회사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작년 중순부터 불과 몇 주 전까지, 선생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들이 대부분 오늘을 위한 준비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되찾으라는 말, 성공은 성공한 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말... 추천해주신 책들도 어제 본 그 회사의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제는 별생각없이 잠들었는데 오늘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이제 곧 선생님을 만나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선생님은 내게 자료를 읽었는지, 테잎은 들었는지 물어보실 것이다. 자료는 읽어보았지만 테잎은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을 시간도 없었다. 선생님은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나의 미래와 꿈을 준비하며, 함께 하자고 권유하실까?
두렵다. 한편으론 끝없는 절망과 회한이 밀려온다. 내가 그토록 따르고 좋아했던 선생님이 왜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건지 알 수가 없다. 설령 그 사업이 정말 비전있고, 정말 획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아직 사업을 할 상황이 아닌데...
엊그제 선생님은 나를 처음 만날 때, 당신은 햇병아리 강사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스스로 초보라는 것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그 때의 선생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내게 문학과 인생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셨던 그 분이 왜 이렇게 변하셨을까.
내가 그 회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을수도 있다.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고, 알고보면 정말 좋은 곳일수도 있다. 그래서 너무 좋은 곳이라서 선생님이 내게 소개시켜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좀 있으면 그 분을 만나야 한다. 나는 내 평생의 은사님으로 모실 줄 알았던 한 분의 스승님을 이토록 망설이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쓰리다. 칼로 베어 소금을 뿌린 것 같다. 모르겠다. 세상이란, 사회란 이렇게도 힘든 곳인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