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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며 부대끼며

우울한 하루

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어느새 주위는 거무룩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집니다. 옷깃을 야무지게 여물어봐도 스며드는 찬 기운을 떨쳐내진 못하겠습니다. 봄이 오기엔 아직 이르지만 아직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남아있다는 느낌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끔벅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웅크린 어깨 너머로 조금 엿보이는 그대 얼굴은 그저 차갑기만 합니다.

분주한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네요. 애써 웃어줍니다. 점원이 안내해준 자리는 밝고 따뜻합니다. 메뉴판을 펼쳐드는 그대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할 뿐입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떠들기 시작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막막한 공기가 제 살을 파고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떠들고 또 떠듭니다. 그대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살짝 웃으며 맞장구를 칩니다. 나는 그대가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입니다. 내가 이 무거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 역시 내 가벼운 말들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함께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음식은 맛이 좋습니다. 그대에게 자꾸 권합니다. 괜찮다는 그대에게 자꾸만 권하고 또 권합니다. 나는 음식을 씹는 그 잠깐 동안의 침묵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를 떠벌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매 순간 무엇인가를 말해야만 합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있는 곳에서의 침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대와의 침묵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잡아끄는 것 같습니다. 발목을 잡혀 헤어나오기 힘들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도망칩니다. 그래서 이렇게 떠듭니다.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 음식점을 나옵니다. 우리는 익숙한 농담을 주고 받습니다. 늘 같은 말장난에 우리는 늘 같은 목소리와 늘 같은 표정으로 웃어줍니다. 웃어보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농담을 오늘 처음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웃어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내색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르는 일입니다.

연극을 봅니다. 끝없이 불편한 연극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과거를 향해 뒤돌아가고 있었고, 그대는 미래를 향해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날 무렵,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소리쳐 불러보고 싶지만 주위가 너무 조용합니다. 나는 침묵이 두렵습니다. 내가 침묵을 견뎌내는 일은 연극의 주인공이 회초리를 맞고, 뺨을 얻어맞고, 팔이 꺾이는 고통을 참는 일보다 더 힘이 듭니다. 주인공의 아픔은 연극이 끝나면 사라지겠지만, 침묵의 비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워집니다. 날카로운 침묵의 날에 나는 그 동안 숱하게 상처입었습니다. 덧나고 곪은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고 진물이 흐를 때에도 그대의 침묵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혼자서도 떠들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바람이 붑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입니다. 그대의 옷깃을 여며주고, 내 목도리를 건네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대의 거절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습니다. 나는 한 자락의 바람도 파고들지 못하도록 더욱 단단히 옷깃을 여밉니다. 그 틈을 비집고 새어들어온 바람은 유난히 차갑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만났고, 맛있는 식사를 했고, 유쾌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습니다. 그대는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먼저 내게 연락하지는 않을 것임을. 나는 웃으며 헤어졌고, 즐겁게 돌아옵니다. 유쾌한 듯 노래도 흥얼거립니다. 가슴이 답답하지만 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맵지만 바람이 너무 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대를 만나면 즐겁고 유쾌합니다. 하지만 그대와 헤어지고나면 나는 기분이 언짢아지고 짜증이 솟아납니다. 불쾌해져버립니다. 다시는 그대를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나는 그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조울증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새로운 일이 있고, 나는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미안하지만 이제 그대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가끔 그대를 먼저 만났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부질없는 헛웃음만 터져나옵니다. 상상은 후회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집착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려놓고 싶은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친구도, 그대의 친구의 친구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이기 이전부터, 그 한 처음부터 말입니다.

켜켜이 쌓인 가식을 털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는 해낼 것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그대를 마주치게 되는 날, 그대의 침묵에 당당한 나의 침묵으로 응답할 수 있겠지요.

그 동안 고생많았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일도 많았고, 고마웠던 일도 많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의 수다에 고통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고, 재미없는 농담에 맞장구쳐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 후로도 너무 오랫동안 그대는 그대와 상관없는 일들 때문에 괴로워했고, 내게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왔습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 역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의 아집을 버리겠습니다. 집착과 허울을 벗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다해도 이제 더 이상 그대의 불편한 모습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