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보다 백 만 배는 친절한 그녀의 배려로 드.디.어. "친절한 금자씨"를 봤다. (그녀는 이미 한 번 봤다는데 나를 위해 한 번 더 봐주었다. 감동의 물결!)
누가 금자씨보고 친절하다고 했어! 젠장. 영화보는 내내 불편해서 혼났다. 이 영화, 유머감각이 없으면 보기 힘든 영화다. 나는 원래 엄청 슬픈 영화든, 엄청 진지한 영화든 조금이라도 웃긴다 싶은 장면이 나오면 웃는다. 영화관에서 볼 때도 키득거리면서 웃는다. 내가 영화관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일종의 정신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보면서 내가 좀 웃었더니 옆에 있던 녀석이 날 무지하게 째려봤다. 하긴 나도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웃고 봤다.
자, 이제 왜 금자씨가 친절하다는 소문이 퍼진건지 슬슬 살펴봐야지..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다 끄집어 낼 겁니다. 괜히 읽고 후회하지 마시고.. ^^;
제목만 친절한 금자씨
웃찾사나 개콘을 재미있게 보려면 "웃을 준비"를 하고 봐야한다. "쟤네, 얼마나 웃기나 한 번 보자."라는 생각으로 보고 있으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제대로 웃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일주일에 하루, 이틀쯤 즐겁게 웃어볼 수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보기 전부터 이미 "이건 재미있을거야"라고 생각했다. '별 거 있겠어? 꼬투리 잡을 데 많겠지?'라고 생각하며 보는 것은 유쾌한 영화감상을 피곤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본 영화였지만 절대 금자씨는 친절하지 않았다. 금자는 불편하고, 어처구니없고, 멍청하며, 짜증나다가도, 아련하고, 안쓰럽고, 안타까우며, 슬픈 사람이었다.
박찬욱 감독 만세
이미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 댄 것처럼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복수 3부작"의 완결편으로 손색이 없다.
박 찬욱 감독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꺼칠한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올드보이"에 나오는 "효과가 있을까? - 없다" 식의 우스꽝스런 대사와 진지한 상황이 동시에 제시될 때,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이거, 웃어야 돼, 말아야 돼?"
오대수와 이금자는 "복수"에 뒤따르는 웃음과 울음의 간극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 오묘한 표정을 짓게 된 것은 아닐까.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 뿐만 아니라 온갖 상황과 장치를 동원해서 그러한 간극을 자아낸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전체적인 서사에 이르기까지 '아귀'를 참 멋드러지게 맞춰가는 사람같다.
꽤나 인상적인 오프닝(감독 이름 나올 때가 젤 멋있었다;), "올드보이"에서 자주 등장했던 화면전환효과("올드보이"에선 벽을 돌아가며 장면이 바뀌었고, "친절한 금자씨"는 문을 열 때 장면이 바뀐다.)등의 화려한 효과는 덤이다.
배우들 만세
이영애. 다시 봤다. "봄날은 간다"에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여자'로 나올 때만 해도 나에게는 "영화배우 이영애"보다 "CF여왕 이영애"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이 영화로 이영애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녀의 그 섬뜩한 눈빛, 그 오묘한 표정은 보지 않고는 상상하지 말라.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의 등장인물들을 다시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류승완 감독은 놓쳤다. 윤진서도 놓쳤다. 아쉽지만 어쩌겠나. 아무튼 전작에서의 역할을 교묘히 활용(?)한 배역은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시리즈의 완결편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어쩌면 내가 신문잡지에 세뇌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금자씨라면? 희생자의 가족들이라면?
영화는 후반부에서 급격하게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인간 군상의 오만가지 모습들을 보여주는 그 장면들은 전혀 웃지 못할 상황임에도 피식 웃음이 난다. 울다가 웃는다. 다행히 똥꾸뇽에 털은 안났지만 굉장히 불편한 심정이 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복수해!"라거나 "복수하지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 뭐 네가 정 하고 싶으면 해야지뭐."라고 질문을 던지고선 결말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묻는다.
"해보니까 기분 좋냐? 어?"
"착하게"살아야 한다는 것, White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너같으면 이 상황에서 참겠냐?"라는 질문에 선뜻 "난 착하게 살 수 있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는 도덕적 판단 기준을 설정할 때 교과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윤리적 이상"이 아닌 한 개인의 실제적인 행동 상황을 기준으로 세워야 한다. 개똥녀를 "천하에 죽일 년"으로 처단했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들이댔던 것 역시 "사람이라면 이러저러해야한다"였다. "내가 만약 개똥녀 같은 상황이었다면 [실제로] 어떻게 했을까"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내 일상의 욕망과 욕구, 온갖 갈등 역시도 따지고보면 나 자신의 행동 양태는 그닥 고려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는 불편했고, 슬펐다.
금자씨의, 금자씨에 의한, 이 땅의 모든 금자씨들을 위한 영화
영화 한 번 짜맞춰 보실까?
1. 이금자 울음+웃음 표정 vs 오대수 울음+웃음 표정
2. 좋은 유괴 vs 나쁜 유괴 ("복수는 나의 것" 대사 인용)
3. 이금자 재갈 물린 장면 vs 오대수 입에다 수건 문 장면
4. 초반 개몸뚱이 백선생 사살 > 중반 폐교에서 똥개 사살 > 후반 백선생 확인 사살
찾아보면 더 있을 듯...
(추가)
5. "복수는 나의 것" 中 좋은 유괴 vs 나쁜 유괴 대사 인용
6. "복수는 나의 것" 中 신하균 누나 신부전증 vs 이금자 감방 동료 신부전증
7. "복수는 나의 것" 中 신하균, 콩팥을 소금에 찍어 먹음 vs 마녀, 남편 살해 후 인육 먹음
내 맘대로 명장면
+ "너나 잘하세요" (말투 연습해야지. ㅋㅋ)
+ "긁으면 간지럽고 안긁으면 가렵고 (퍽)
긁으면 간지럽고 안긁으면 가렵고 (퍽)"
- 어쩌면 "복수"라는게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 "예뻐야돼... 뭐든지..."
- 범행재현때 목졸랐던 끈을 고쳐맬 정도로 강박증이 있는 금자.
이 정도는 돼야 그 정도 복수를 하지..암..
+ "나, 사람 하나 더 죽일거 거든?" - 폼 잡던 근식이, 금자의 한 마디에 바로 꼬리 내림
+ 후반부 폐교에서 광록이형의 "조립" - 대사 없이 제대로 웃겼음
+ 백선생을 때리던 금자가 카메라 꼬라보는 표정 - 소름 좌악 돋았음.
+ 금자가 울면서 웃는 표정 - 오대수의 그것과 비슷. + 애상함 정도?
+ 라스트씬 -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채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금자.
뒤에서 껴안아주는 딸. 그리고 눈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제과점 청년.
- 최소한의 위안과 함께 불편함과 속시원함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길었다. 그만큼 재미났다.
마지막 의문 하나.
고딩 금자가 백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시커먼 가슴털을 자랑하며 막 샤워를 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백선생이 금자랑 잤을까? -_-;;
#. 영화는 "복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백선생과 떼거리로 모인 피해자 가족들은 천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밖에도 '긴 머리 한실장님'이었던 전도사라든지, '황색언론에 대한 나레이션'이라든지, 꽤나 썩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씨바, 돈이 인간을 먹어버리는 세상. 슬프고도 무서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