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의 추천을 통해 모 학교에 서류접수를 하고 온 날, 친구가 보낸 문자다. 내 친구의 애인인 그녀에게 나는 "AB형의 단점을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위험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낙인찍혀 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별난 녀석" 이상의 평가를 받지는 않는걸로 봐서 그녀의 판단은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에 근거를 둔 것 같다. 그 친구가 나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딱 그만큼 나는 그녀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쨌든 그 학교는 공개채용을 하기 전에 몇 가지 루트를 통해 교사를 선발하고자 했고 나는 그 루트 중의 하나를 통해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담당 선생님이 우리 학교, 우리 과 선배라는 사실과 교수님이 나의 '품행'과 '학업성적' 등을 고려하여 추천한 것이 아니라 과사무실의 조교형이 같은 학회 선배였기 때문에 연락이 닿았던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고나면 "제대로 줄 탔구나!"라고 할만하다. 소위 말하는 바로 그 인맥. 조금 더 나아가서 학벌.
결과부터 말하자면 줄타기는 실패다. 내가 교장 선생님께 얼굴도장을 찍고 오던 날, 이미 몇 개의 서류는 접수된 상태였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면접을 보게 된다. 매일 각 교육청과 기타 관련 사이트들의 공고문을 확인하는 내가 그 학교의 공고문은 보지 못했으므로 학교측에서 몇 명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한 듯 했다. (사립학교장회라는 곳에서는 매년 교원임용대상자 명부가 수록된 책자를 발간한다. 나는 작년에 시기를 놓쳐 등록하지 못했는데 실제 사립학교에서 신규교원을 임용할 때 이 책자를 많이 활용하는 것 같다.)
처음 과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을 때, "혼자 힘으로 정정당당히 교사가 될 것이다"라며 정중히 거절했어야 옳은 일이었을까. 이번 일이 내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던 것들을 모두 입바른 소리, 허튼 소리로 전락시켜버리고 "너도 어쩔수 없구나, 입만 살았어"라는 조소 섞인 비난을 듣게 만든 것은 아닐까.
지금은 내가 어떤 말은 하든 "그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 결국 인간적인 관계와 학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구별하지 못한 나는 정치의식도, 경제의식도, 계급의식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성숙하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하게 되나보다.
지금껏 생각한대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만들어진 길을 착실하게 걸어오기만 했던 나에게 "나만의 생각"이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자신은 정해진 틀 속에서 편히 지내왔으면서 저항과 변화를 말하는건 위선에 불과한 것 아닌가.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던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너희들의 꿈을 찾고, 그 실현을 위해 살아라", "인간은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으며 너희들은 장차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않길 바란다"라고 말할 때, "선생님은 XX대학교 졸업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할지도 모를 학생들에게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아야하는 것인지...
어쨌든 다음주에는 면접을 보게 되었고, 만약 합격하게되면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불안한 것은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어떻게 하면 좋은 국어 수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곧 닥쳐올 이상과 현실의 부대낌을 과연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나는 아직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얗게 쌓인 눈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