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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며 부대끼며

씨앗을 묻으며


씨앗을 묻으며

- 이희중

먼 우회(迂廻)의 길을 걸어 오늘 여기 서 있네
풍향이 바뀌는 길목에서 한때는
삶과 사랑과 기쁨을 노래하기도 했으나
아직도 어둡고 메마른 시간 어귀
마른 땅에 씨앗을 묻으며 기다려 보나니
망설임 없이 피는 꽃이 있던가
제 살갗을 찢는 아픔을 견디고서야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것
오늘이 죽음과 미움과 슬픔의 시간일지라도
어두운 흙 속에서 숨쉬는 씨앗에게
품 속 내 낡은 삶의 부적을 건네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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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아들의 아침밥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일으키신 어머니를 기억하며 나는 씨앗을 묻으러 나간다. 올해의 끝자락에서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나는 씨앗을 묻고, 물을 주고, 거름을 준다.

아직은 어둡지만, 아직은 메말랐지만
피어날 꽃에 대한 희망으로 새벽 바람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