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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종이 땡땡땡

고기를 먹지 않는 여친

+채식,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힘 by 달군
+풀만 먹으며 살고 싶다 by dakdoo

내 사랑하는 여자친구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못먹는 것이 아니라 안먹는 것이다. 작년 가을, 수 년만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내 여친이 몇 년째 고기를 먹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참으로 놀라웠던 그 날의 저녁식사 메뉴는 부대찌개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먼저 제안한 메뉴였지만 그녀가 잘 먹지 않는 이유가 나를 만나서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큰 약점으로 손꼽힌다. 갈비없는 졸업식, 삼겹살 없는 회식, 순대 없는 떡볶이, 탕수육 없는 짜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내게 쉽지 않았다.

여친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도 수 년간 지속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었다. 그녀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동물이 불쌍하기 때문"이란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거창하게 여기기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어쩌면 채식주의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데 지쳤거나 사람들의 주목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dakdoo님의 글을 보니 더더욱...) 하지만 그녀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그녀의 채식이 자연스럽게 수긍이 갔다.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은 동물들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직까지 여자친구와 음식 문제로 고민해본 적은 없다.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오늘은 무얼 먹을까?"라는 고민은 "나는 고기가 좋은데 너는 안먹잖아"라는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 덕분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들이 있다는 걸 새삼 하나씩 확인해보는 재미가 생겼다. 요기국수서울에서 두번째로 맛있는 단팥죽도 먹어봤고, 야채피자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니까. 고기를 먹고 싶을 땐 나만 고기메뉴를 시키면 되고. (사실 대부분 이렇게 주문한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야채볶음밥, 이런 식;;;)

그녀를 만난 이후로, 나는 콜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언젠가 잡지의 기사를 보며 (아마 인도에서 콜라 시위가 났을 때 즈음일 것이다) 몸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거대한 콜라 회사가 돌아가는 모습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가급적 탄산음료를 멀리 하고 다른 음료를 주로 마시는데 (특히 바나나 우유! 바나나 우유는 빙그레 단지 우유가 최고다!) 그렇다고 전혀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땡기면 잘 사다 마신다;;

둘이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단지우유를 마시며 여유롭게 데이트를 즐기다보면 조용하지만 넉넉한 행복이 밀려온다. 두 손을 마주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이 새삼 무게감있게 느껴지곤 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즈막한 고민들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 여자친구의 채식을 지지한다. 설혹 훗날 우리의 아들딸들이 엄마의 고기 요리를 두려워할지언정 나는 그녀가 지금의 삶의 방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온 시내를 자전거로 누빌 수 있고, 저녁식사 후 산책길에 어깨동무를 하고 가다 놀이터 한 켠에서 작은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삶,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부자가 되기보다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런 삶의 시작이 지금 그녀의 채식주의에서 조금씩 싹트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