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한결 차가워졌다. 이연이는 자뭇 옷깃을 여미며 이제 슬슬 겨울 옷을 꺼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연이도 한 때는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친구들과 단풍구경을 가곤 했지만 결혼한 뒤로는 옷 생각이 먼저 난다. 남편은 늘 아직도 신혼이라고 주장하지만, 연애하던 때의 바람은 이렇게 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에 부대낀 얼굴이 발가스름해질 무렵, 슈퍼에 도착했다. 남편이 귀가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오늘 저녁은 무얼 해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던 것도 꽤 오래 전 일이다. 진수성찬이라는 둥,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본다는 둥 늘 요란하게 식사를 하던 남편이 조용히 밥을 먹게된 그 어느 날부터 이연이도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고기도 사고, 당면도 사고, 온갖 야채와 다듬어 놓은 해파리도 샀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재준이가 놀러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연이는 톡 쏘는 겨자 소스가 싫어서 해파리 냉채를 잘 먹지 않았지만 제준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해준 해파리 냉채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너끈히 비울 정도로 좋아하는 메뉴였다. 남편은 유난히 고기를 좋아해서 결혼하고 따로 살림을 차린 이후로, 해파리 냉채는 거의 먹지 않던 음식이었다. 맛있게 만들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제준이가 좋아할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슈퍼에서 한 보따리 사가지고 돌아오는데 냉채에 들어갈 겨자 소스를 만드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표 겨자 소스'의 제조법을 잊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깟 겨자 소스 만드는 법 쯤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서 나올 때보다 바람이 한결 차가웠다.
집에 오자마자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에서 맛있는 겨자 소스를 만드는 법을 찾아서 연습장에 적어놓고서야 장본 것들을 정리하고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밥솥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쌀을 안치고, 불고기 양념을 만들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나 재준인데 오늘 말고 내일 갈께."
동생 온다고 잔뜩 준비를 하던 이연이는 맥이 탁 풀렸다.
"뭐라구? 무슨 소리야! 너 온다고 해서 맛있는 거 만들고 있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파리 냉채도 할거야."
"응, 고마운데 오늘 저녁에 기철이랑 술 한 잔 하기로 했거든. 미안해."
"그럼 기철이랑 같이 와. 나도 기철이 본 지 오래 됐는데."
"아니야, 내일 가서 먹을께. 해파리 냉채, 꼭 남겨둬야돼! 알았지?!"
"에휴... 할 수 없지뭐. 내일은 꼭 와야돼! 응?"
내일 모레면 서른이 되는 동생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알았어. 매형한테 내일 내가 맛있는 술 가져간다고 전해줘. 내일 봐, 누나."
"술은 무슨 술이야. 그냥 오기나 하셔."
이연이는 전화를 끊고 식탁 의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기철이는 중학교 때부터 재준이랑 붙어 다니던 친구라서 둘의 사이가 어떤지는 이연이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얼굴 보는 피붙이보다 친구가 더 좋은가 싶어서 서운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기왕 준비한 것이니까 오랜만에 남편 포식이나 시켜주어야 겠다 싶어서 불고기는 재워두었다. 해파리 냉채는 내일 저녁 때 만들 생각이었다. 겨자 소스 만드는 법을 적은 연습장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텔레비전 앞에서 귤을 까먹으며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이 되어도 해파리는 봉투에 싸인 채 냉장고에 있었고, 냉채에 들어갈 야채들도 채썰어지지 않았다. 불고기거리는 양념을 잔뜩 머금어 양념 국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온밥솥에는 어제 저녁에 해놓은 밥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고, 당면은 봉지 채 부엌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재준이가 오늘 오후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텅 빈 이연이의 집에는 바람소리만 더욱 크게 울리고 있다.
바람에 부대낀 얼굴이 발가스름해질 무렵, 슈퍼에 도착했다. 남편이 귀가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오늘 저녁은 무얼 해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던 것도 꽤 오래 전 일이다. 진수성찬이라는 둥,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본다는 둥 늘 요란하게 식사를 하던 남편이 조용히 밥을 먹게된 그 어느 날부터 이연이도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고기도 사고, 당면도 사고, 온갖 야채와 다듬어 놓은 해파리도 샀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재준이가 놀러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연이는 톡 쏘는 겨자 소스가 싫어서 해파리 냉채를 잘 먹지 않았지만 제준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해준 해파리 냉채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너끈히 비울 정도로 좋아하는 메뉴였다. 남편은 유난히 고기를 좋아해서 결혼하고 따로 살림을 차린 이후로, 해파리 냉채는 거의 먹지 않던 음식이었다. 맛있게 만들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제준이가 좋아할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슈퍼에서 한 보따리 사가지고 돌아오는데 냉채에 들어갈 겨자 소스를 만드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표 겨자 소스'의 제조법을 잊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깟 겨자 소스 만드는 법 쯤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서 나올 때보다 바람이 한결 차가웠다.
집에 오자마자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에서 맛있는 겨자 소스를 만드는 법을 찾아서 연습장에 적어놓고서야 장본 것들을 정리하고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밥솥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쌀을 안치고, 불고기 양념을 만들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나 재준인데 오늘 말고 내일 갈께."
동생 온다고 잔뜩 준비를 하던 이연이는 맥이 탁 풀렸다.
"뭐라구? 무슨 소리야! 너 온다고 해서 맛있는 거 만들고 있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파리 냉채도 할거야."
"응, 고마운데 오늘 저녁에 기철이랑 술 한 잔 하기로 했거든. 미안해."
"그럼 기철이랑 같이 와. 나도 기철이 본 지 오래 됐는데."
"아니야, 내일 가서 먹을께. 해파리 냉채, 꼭 남겨둬야돼! 알았지?!"
"에휴... 할 수 없지뭐. 내일은 꼭 와야돼! 응?"
내일 모레면 서른이 되는 동생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알았어. 매형한테 내일 내가 맛있는 술 가져간다고 전해줘. 내일 봐, 누나."
"술은 무슨 술이야. 그냥 오기나 하셔."
이연이는 전화를 끊고 식탁 의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기철이는 중학교 때부터 재준이랑 붙어 다니던 친구라서 둘의 사이가 어떤지는 이연이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얼굴 보는 피붙이보다 친구가 더 좋은가 싶어서 서운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기왕 준비한 것이니까 오랜만에 남편 포식이나 시켜주어야 겠다 싶어서 불고기는 재워두었다. 해파리 냉채는 내일 저녁 때 만들 생각이었다. 겨자 소스 만드는 법을 적은 연습장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텔레비전 앞에서 귤을 까먹으며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이 되어도 해파리는 봉투에 싸인 채 냉장고에 있었고, 냉채에 들어갈 야채들도 채썰어지지 않았다. 불고기거리는 양념을 잔뜩 머금어 양념 국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온밥솥에는 어제 저녁에 해놓은 밥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고, 당면은 봉지 채 부엌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재준이가 오늘 오후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텅 빈 이연이의 집에는 바람소리만 더욱 크게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