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답게 놀기

끝나지 않은 동행 - 사고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기어를 넣고 액셀레이터를 밟고 가끔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하고 있다. 눈물 따위는 흐르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머리 속이 맑아지고 있다. 빵빵대며 끼어드는 택시도,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며 곡예질하는 새파란 녀석들이 탄 외제차도 오늘은 곱게 보내준다. 나는 그저 조용히 운전대만 잡고 있을 뿐이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또 그 녀석이 음주운전하다가 접촉사고를 낸 줄로만 알았다. 중학교 때부터 바른 생활 사나이로 불리던 녀석이었는데 유독 술만큼은 바르게 마실줄 몰랐던 녀석이었으니까.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길래 이번엔 좀 크게 다쳤으리라 짐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쯤 크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고 다시는 음주 운전을 안하게 될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울먹이며 전화하는 누님께 퇴근하면 병문안가겠노라고 말씀드린 게 불과 3시간 쯤 전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친구라곤 몇 안되는 녀석 중의 하나라서 청소검사는 대충 하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는 찰나, 전화가 왔다. 녀석의 누님이 알아듣지 못할 만큼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한참동안 우시다가 겨우 진정하신 누님은 녀석이 죽었다고 말해주셨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녀석을 보러 병원을 가고 있을 뿐이고, 늦게 가면 그 녀석 얼굴도 못보겠다는 생각뿐이다. 언제나처럼 기어를 넣고, 액셀레이터를 밟고, 브레이크를 가끔 밟으며 녀석에게 가고 있다. 어서 가서 왜 또 술처먹고 운전했냐고 핀잔을 줄 생각이다. 이제 누님께 걱정끼쳐 드리는 짓은 그만 하라고 짐짓 준엄하게 꾸짖어줄 생각이다.

병원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받은 주차권을 아무렇게나 팽개쳐두고 서둘러 주차시켰다. 안전벨트를 풀다가 문득 어제 녀석이 마시고 버린 음료수캔이 아직 조수석에 있는걸 보았다. 칠칠맞은 자식은 꼭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고 투덜거리며 빈 캔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갔다.

병원 안에서는 금연이라서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두어 모금을 채 빨기 전에 녀석이 죽었다는 누님의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메마른 겨울밤 내내 기침 때문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날처럼 목이 칵 막혀왔다. 피다 만 담배는 대충 짓이겨놓고 서둘러 병원으로 들어갔다.

입원실로 올라 갔다. 녀석이 아직 응급실에 있다던 누님의 말이 번뜩 생각나서 다시 내려 왔다. 뛰어 내려 갔지만 녀석은 그 곳에 없었다. 간호사에게 물으니 벌써 영안실로 갔단다.

그랬다. 녀석은 죽은 것이다. 어제 내 차에서 담배와 커피의 조합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던 그 녀석이 죽었다. 오늘 아침, 너네 집에서 하루 자고 갈테니 준비해놓고 있으라던 그 녀석이 죽었다. 오늘 점심 때, 오랜만에 고기 파티하자며 삼겹살에 소주 사놓고 기다리고 있으라던 그 녀석이 죽은 것이다.

다리가 풀려 걸을 수가 없다. 침침한 빛을 내고 있는 영안실 안내판 아래에 털썩 앉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더니 지나가는 간호사가 보고는 호되게 소리친다. 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친구가 죽었는데 담배도 한 대 못피우냐고 고함을 지른다. 끝까지 잔소리하는 간호사의 성난 목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기어이 필터 끝까지 다 피워낸다. 어지럽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조금 축축해졌지만 이내 따뜻해졌다. 언젠가 녀석이 말했었다. 내 무릎이 지 애인 무릎보다 따뜻한 것 같다고. 미친 놈. 조금 더 축축해지는 느낌이다. 다리가 저려온다. 하지만 고개를 들 수 없다.

2004년의 끝을 잡고 그 동안 미뤄왔던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다.